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역사 (문단 편집) === 노란 바람의 시작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sport.sk/borussia_dortmund_zakladatelia_bvb_fb_3.jpg|width=100%]]}}}||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창단한 젊은 청년들'''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09년 12월 19일 트리니티 유스의 불만이 많은 18명의 젊은이들에 의해서 창단되었다. 도르트문트에는 성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 클럽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그들은 지역 청년들의 진취적인 바람을 다 수용할 수 없었고, 18명의 젊은이들은 트리니티 유스를 떠나 '''구기 클럽 보루시아 09 도르트문트(Ballspiel-Verein Borussia 09 e. V. Dortmund)'''를 창단하였다. 그렇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란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들의 축구 클럽을 갖게 된 젊은이들은 향후 차분한 걸음으로 명문 클럽으로의 도약을 꿈꿨다. 보통 젊은 혈기에 의해 건설된 클럽 대부분은 곧바로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 전력 보강을 시도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르트문트는 전국 리그(지금의 분데스리가)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 대신 지역 리그에 주로 참여해 명문 클럽으로 가는 초석을 닦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결정은 젊은 혈기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히 클럽의 미래를 건설하고자 했던 마음에서 나온 것이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이름 중 "Borussia"의 어원은 팀 결성 당시 그들이 모였던 양조장인 "Borussia Brewery"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센 왕국과의 연관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출처 : http://www.bvb.de/eng/BVB/History/1909, "By the way, the name ”Borussia“ is leant from the Borussia brewery on the street Steiger Strasse."] 물론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작용하기도 했다. 언급했던 도르트문트는 젊은이들에 의해 창단된 클럽인데, 그러다보니 재정적 자립도가 약할 수밖에 없었고,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클럽을 만들었던 탓에 투자를 하려는 사람들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또 창단 후 10년 정도가 지난 1920년대에는 적극적인 스폰서 유치로 인한 클럽의 덩치 키우기에 도전했으나, 이 역시 경험 부족으로 인해 참담한 실패만 맛본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도르트문트의 도전은 클럽 파산 위기의 원인이 되는데, 자칫 클럽이 사라질 수도 있었던 극심한 재정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처음 그들이 보여준 진취적 바람에서 나왔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spox.com/borussia-dortmund-bvb-100-jahre-1.jpg|width=100%]]}}}|| || '''도르트문트의 초창기 홈 경기. 슈타디온 로터 에어데[* Stadion Rote Erde. 현재는 도르트문트 2군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르트문트 1군이 1974년까지 이 곳을 홈 경기장으로 이용할 당시엔 약 4만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축구 전용구장이었으나 이후 리노베이션을 통해 육상 트랙이 추가된 오늘날의 종합경기장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육상 경기 수용인원은 2만 5천명, 축구 경기 수용인원은 9,999명이다.] 모인 많은 도르트문트의 홈 팬들''' || 지역 주민들은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는 도르트문트를 그대로 망하게 두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젊은 사람들이 올바른 축구 클럽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던 그들의 건강한 초심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르트문트의 팬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건강한 클럽을 만들어주길 당부하며 도르트문트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런 서포터들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은 도르트문트는 클럽의 간판을 내려야 할 위기를 간신히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큰 위기에서 벗어난 도르트문트는 본격적으로 비상을 준비했다. 20여 년 동안 지역 리그에서 갈고 닦은 실력에다 큰 실패로 인한 교훈, 여기에 지역민들의 깊은 사랑까지 두루 얻은 도르트문트에게 성공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그들을 괴롭혔다. 1930년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을 뒤흔든 [[나치즘]]때문이었다. 극도의 [[전체주의]] 정당이었던 나치즘은 독일 내 모든 스포츠 및 운동 단체들에게 “우리의 목표에 맞게 팀을 운영하라”라는 간결하면서도 섬뜩한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정권 선전 도구로 스포츠를 이용한 것이다. 이는 축구 클럽인 도르트문트도 예외일 수 없었다. 도르트문트는 나치즘의 그런 권고를 무시해 당에 가입하지 않는 등 항전의 자세를 취했고, 그런 도전은 성난 나치즘으로 하여금 클럽 경영진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큰 생채기를 남기게 하고 말았다. 이후엔 클럽 내부에서 나치즘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작업이 계속됐고, 그렇게 색출된 사람은 공개 처형을 당하는 등 클럽 내 어두운 그림자가 계속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게 팀이 커다란 혼란에 흔들렸으니 선수들은 물론 도르트문트를 응원하는 팬들까지도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도르트문트에도 희망의 빛이 깃들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도르트문트는 나치즘 초창기 가입을 거부하고 항전했다가 클럽 경영진이 송두리째 바뀌어 나치즘 신봉자들이 클럽의 실권을 장악하게 됐는데, 바로 이 문제가 세계대전 종료 후 연합군들에게 또 다른 명분을 제공했다. 연합군은 당시 독일 내 나치즘의 잔재를 몰아내는 데 힘을 쏟았는데, 클럽 경영진과 직원 대부분이 나치즘이었던 도르트문트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클럽이 해체당한 것이다. 다행히 주변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클럽들과 합병해 그럭저럭 명맥은 이어갈 수 있었지만, 원하지도 않았던 나치즘으로 인해 수십 년의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